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2012

2012_0314 ▶ 2012_0327

김남현_Confined One 2_시멘트, 스틸, 우드_187×50×55cm_2008 김남현_Confined One 3_시멘트, 스틸, 우드_125×55×40cm_2008 김남현_Confined One 4_시멘트, 스틸_33×110×35cm_2008

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6:00pm

책임기획 / 장경호

참여작가 김남현_고충환 추천 김효숙_김종길 추천 박미현_박영택 추천 양문모_김진하 추천 허용성_유근오 추천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역학개념으로 인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뒤 일정기간의 잠복기를 거쳐서 발병되는 발화점을 이른다. 이는 흔히 철학이나 사회 또는 예술 등 기타 제 분야에서 소수에 의한 어떤 형태의 사고 또는 행동이 수면아래서 진행되다가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 는 것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날로 다원화되는 세계에서 생산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단일한 그물망으로 포획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티핑 포인트』展은 35세 이하의 신진작가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작업에 내재되어 있는 다기한 발언들을 기존의 작가, 평론가의 눈을 통해 다양하게 들추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 장경호

예전에 예절교본이란 것이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아마도 지금도 있을 것이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절하는 올바른 자세나 차를 따르는 정 자세를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교본으로 치자면 군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인데, 경례와 목례, 총검술과 군무와 같은 사례집들이 그렇다. 흥미롭고도 당연한 것은 이런 각종 교본이 제도적이고 관료적인 사회집단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학교와 기숙사, 군대와 감옥 같은. 미셀 푸코는 이 사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사회 혹은 부재하는 사회라고 불렀다.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이지만 정작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억압적인 사회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도는 개별주체에게 전체주의를 요구하고 개인은 일탈과 자율을 꿈꾸지만 정작 처벌이 두려워 이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에 내어준 자기와 일탈을 꿈꾸는 자기로 분리되고, 겉보기에 멀쩡한 자기와 억압을 내재화한 자기로 분열된다. 프로크루테스가 법이고 권력이라면 개인들은 저마다의 키를 그의 침대에 맞출 수밖에. ● 김남현의 작업은 바로 이런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현실을 다룬다. 여기에 경례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키스하는 자세와 세일즈맨의 자세(태도?)를 바로 잡아주는, 두 손을 번쩍 들거나 머리 뒤로 깍지 껴 완벽하고 안전하게 투항하는 자세를 교정하고 훈육하는 장비들이 있다. 말이 교정이고 훈육이지 그 장비들은 실제로는 무슨 억압의 도구들 같고 고문과 감금의 장비들 같다. 그 장비들은 풍자적인데 도구화된 이성을, 맹목적인 종교를, 효율의 극대화에 맞춰진 기계화된 사회를, 나아가 사사로운 욕망마저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회를 증언하는 메타포 같다. ● 그래서 개인들은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을 떠나 개인주의로 도피한다. 일인용 소변기와 좌변기, 일인용 욕조, 일인용 병상, 일인용 가옥과 막사, 일인용 놀이기구, 일인용 숲과 정원,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인용 강의실(이라기보다는 도구) 속으로 숨는다. 그 장비며 도구들이 폐쇄적인 현실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감옥에 가두는 일인용 감옥에서 극대화된다. 이 장비며 도구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돼 있지만 터무니없지는 않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을, 희극적인(아님 비극적인?) 현실을 침묵으로써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김효숙_My Floating City-Lef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1cm_2010

김효숙의 작품에 관한 첫 미학적 인상은 고충환이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색을 잃어버린 시대 곧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바치는 레퀴엠 같고, 그 상실의 시대를 증언하는 익명적 주체들 즉 얼굴 없는 사람들에 바치는 오마주" 같았다. 그가 주제어로 내세운 "부유하는 나의 도시"로서의 회화적 장면들은 속도와 도시, 인간의 유비적 삼각관계가 '욕망의 실존성'으로 뭉쳐서 비극적으로 해체된 상태를 보여준다. 근대이후 속도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세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상징적이며 실체적인 진리였다. 수세기, 수십 세기의 느슨하고 게으른 진화적 시간체계가 다급하고 노동집약적인 시간체계로 변화하면서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속도는 거대 근대도시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 속도는 뉴타운 개발정책과 디지털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메가폴리스 정책에 의해 근대도시를 다시 해체하기 시작했고, 21세기형 도시건축을 실험하는 미래도시를 생성시키고 있다. 김효숙의 장면들은 그런 해체와 생성 사이의 속도를 파편화된 잔상으로 길게 늘인 뒤 잔상의 표면에서 떠 올린 시간의 한 프레임이다. 그 프레임에는 인간성을 유지하고 상승시키는 생태적 관계들이나 정신적인 것(영성에 가까운), 윤리적인 것(철학에 가까운)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과 지혜, 숭고와 경외를 자아내는 연기적 사물들, 공간들조차 없다. 플라톤의 철학을 원용한다면, 김효숙의 장면들이 만들어 낸 세계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모상(icon:모방된 것)이다. 현실이 상실된 비현실의 현실이므로. 미메시스 즉 이것의 원형은 도시가 아니라 도시를 파괴하고 파괴된 자리에 다시 도시를 세우는 욕망일 따름이다. ■ 김종길

박미현_untitled1_한지에 샤프펜슬_63×93cm_2011

박미현의 그림은 한지(음양지, 유지油紙)에 샤프심으로 섬세하게 제작한 드로잉이다. 미세한 종이 위에 흑연을 사용해 단호하게 칠해나간 흔적이다.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특정 사물의 외양이나 구체적인 어떤 것을 연상시켜주지 않는다. 기하학적 도형이나 상상되어진 특별한 형태와도 같아 보인다. 다만 부드럽고 번짐이 좋은 흑명이 유지 사이로 스며들어 응고된 자취만이 또렷하고 마냥 선명하다. 0.5mm 샤프펜슬을 사용해 섬세한 표현을 만들었고 부드러운 표면효과를 건져올리고 있다. 닥나무를 재료로 하여 표면을 잘 압착한 한지(음양지)는 견고하며 표면이 매끄럽고, 수채화지에 비해 흑연이 뭉치지 않아 더없이 번짐이 좋다. 유지는 일반 한지에 비해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기름을 먹은 누런빛이 인공적이지 않고, 흑연과의 조화에서 차분하다. 한지의 그 오래되고 익숙한 느낌과 그 위로 밀착된 흑연의 단호한 자취가 모여 매력적인 그림/드로잉을 만들어 보인다. 이런 격조 있는 드로잉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새삼 회화의 근원에 대해, 그리기의 방법론에 대해 그리고 평면과 물질에 대한 여러 생각을 자아내는 작업이란 생각이다. ■ 박영택

양문모_Ex Ungue Leonem_캔버스에 유채_150×300cm_2011

한국현대회화에서 '사회적 서사'가 실종 된지 한참이나 되었다. '역사', '세계', '사회', '이념' 등의 어휘가 사라진 자리에 '팝', '시장', '개인', '재미' 등의 가볍고도 감각적인 토로가 그 자리를 채운 지 오래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양문모의 '군중'을 소재로 한 인식적 서사가 눈에 띈다. ● 양문모의 작업은, 화면내의 또 다른 사건이나 타인 혹은 화면 밖의 나를 응시하는 한 무리의 군중들이 그 형상화의 대상이다. 군중(Crowd)은 어떤 현상에 대한 공통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리를 지칭한다. 다양하고도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상하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의 대중(Mass)이나, 정치사회적 계급을 일컫는 민중(People)의 개념과는 다르다. 양문모가 의미규정이 다소 모호한 '군중'을 소재로 한 것은, 통념화 되고 개념화된 세계와의 인식(과 감성)적 단층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제시하기에 적합한 소재이기에 그런 것 같다. 그의 그림내의 군중은, 외부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공통적인 자세나 태도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그런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시선의 제시를 통하여, 양문모는 우리들의 보는 행위가 과연 주체적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는 동시에 인간일반의 존재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사유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 이 젊은 작가의 이런 관찰자적 자세에 그만의 개인적 생존의 지문을 얹는다면, 좀 더 독자적이고 육중한 회화적 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김진하

허용성_Marmotte No.3_한지에 채색_117×91cm_2011

침묵의 절규와 무시의 응시허용성이 그려내는 일련의 초상들은 대립과 응전의 세계를 향해 던지는 인간의 한계와 좌절의 절규로 보이지만, 의외로 화면은 극도의 침묵과 고도의 정태적 방식을 택한다. 탈색된 신체와 무표정, 그로부터 빚어지는 절망과 체념의 뉘앙스는 물질적 무소유뿐만 아니라 정신적 무념도 내포하는 듯하다. 따라서 초상들은 종종 관객에게, 그려진 인물들의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불신, 직관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 타자에 의해 조종 받지 않을 것이라s는 확신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몹시 꺼림칙한 의심을 던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초상들의 무념적 정적은 인고의 세월에서 오는 정적이 아니라 실존의 처절함을 너무 빨리 수긍하여 나타나는 의연하면서도 적나라한 정적이다.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긍정하면서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으려는 품격의 정적, 바로 역설의 정적 그것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휴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하는 초상의 현상과 본질이 겹쳐지는 순간,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와 의식의 흐름을 공유하게 하는 기묘한 매력을 갖게 한다. 그것은 '대립을 배제하려 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반영의 방법론이다. ■ 유근오

Vol.20120314k |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2012展